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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  >  독일 연구, 자료실
독일과 주님의 회복의 역사(2)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작성일2018.08.29 조회수1836 댓글0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

 

 

 

 

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삶

마르틴 루터는 작센 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루터는 아주어렸을 때 학교로 보내어 졌는데,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서 학교와 가정에서의 훈육은 엄하고 가혹했습니다. 1505년 그는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7월, 루터는 극심한 뇌우(雷雨)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8월에 에그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의 영혼을 밤낮으로 괴롭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의 질문은 바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고 몇 년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수도사가 수도 행위로 천국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벌써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았어야만 한다.” 이후 루터는 독일 전체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교 총대리인 폰 슈타우피츠와 성경을 읽음으로 구원에 대한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는 루터에게 자신의 행실과 서원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그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긍휼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에게 흘러가야 함을 알려 주었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당신의 주요한 일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라는 훌륭한 조언과 함께 루터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것은 루터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 중 그가 가장 열망해왔던 선물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한 신성한 빛의 광선이 루터의 어두운 마음을 관통하였습니다. 슈타우피츠와의 대화를 통해 루터는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과의 화평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영적으로 무지하였고,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운 형상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들은 그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절망으로 압도되어 누워있었는데, 한 노(老) 수도사가 그를 방문하여 평안의 길에 대해 말할 때, 루터는 그의 친절함에 설득되어 그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현명한 수도사는 그에게 믿음의 효능을 반복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루터에게 ‘나는 죄들에 대한 용서를 믿습니다.’라는 말을 믿는 것은 다만 일반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믿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향한 성령의 증언은 이것입니다. 그대의 죄들은 용서받았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신성한 빛이 루터의 마음에 들어왔고, 부지런한 말씀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그는 점점 주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종이 되어 갔습니다. 루터는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매우 갈망하였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의’라는 이 한 가지 표현이 나를 방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그분은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처벌하시는 분이시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밤낮으로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말씀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때 까지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순전한 긍휼과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의’라는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나는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를 증오로 가득 채웠는데 지금은 그것이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커다란 사랑 안의 달콤함이 되었습니다.”

 

1507년, 루터는 성직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510년 성직자로서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 그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의 관저에서 예수님이 오르신 계단이라고 알려진 성계단(ScalaSancta) 성당의 28개의 대리석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루터가 계단을 기어오르며 기도를 반복할 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고, 그 말씀은 그로 하여금 계단을 기어오르는 것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즉, 루터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2.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507년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비텐베르크와 에르푸르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에 헌신적이었으나, 1510년에 로마를 방문했을 때 성직자들 사이에 스며든 타락한 행실을 보고 천주교를 향한 충성심이 약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는 로마 천주교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517년, 종교개혁을 위한 결정적인 해가 왔습니다. 그 해에 교황 레오 10세가 임명한 도미니크 회의 수도사인 존 테첼은 면죄부를 팔기 위해 왔습니다. 그 당시에 교황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존 테첼은 면죄부를 판매하며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앞으로 저지르려고 의도했던 죄들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완전히 밀봉된 편지들을 줄 것입니다. 세상에 면죄부가 사면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죄는 없습니다. 다만 제대로 돈을 지불하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용서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테첼은 또한 이렇게까지 말하였습니다. “헌금함에 동전이 땡그랑하고 울릴 때마다, 연옥으로부터 영혼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면죄부는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이러한 상황에 분개한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과 로마 천주교에 대한 책망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중적인 연설에 만족하지 않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궁정 교회의 문 앞에 면죄부의 판매를 비난하는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소식은 유럽 전역을 걸쳐 들불처럼 퍼져 나갔으며, 루터로 하여금 교황의 권력과 격렬하게 충돌하게 하였습니다. 교황은 루터에게 로마에 와서 그의 이단적인 말들을 설명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루터는 이에 대해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1518년, 루터는 로마에서 추기경 카예탄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매우 분명한 말로 교황이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철회를 요청하였고, 철회라는 결정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루터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말하였습니다. “그러하다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카예탄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명령을 하기 위하여 온 것이지 논쟁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자 루터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함께 논쟁의 요점에 대하여 토론하고 그것들을 신성한 성경의 말씀에 따라 판단합시다.” 카예탄은 마르틴 루터가 권력에 반대하고, 통치권을 가진 교계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음에 놀랐습니다. 비록 그는 루터를 진멸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돌아가 회담에서의 자신의 실패를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예탄은 교황에게 그 어떤 충고와 협박, 간청과 최고의 명예에 대한 약속도 이 고집스런 독일인을 돌이키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카예탄의 실패로 인하여 교황은 또 다른 대리인인 찰스 폰 밀티츠를 보내어 루터를 다루게 했습니다. 밀티츠는 루터에 대한 소송 사건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거만했던 카예탄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밀티츠는 교활한 외교관이자 교황의 추종자로서 루터를 회유하였고, 루터는 마치 그의 덫에 걸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교황제도의 옹호론자인 에크 박사는 루터의 친구인 칼슈타트에게 신학에서 논란이 되는 쟁점들과 면죄부를 반박하는 루터의 선언문에 대한 공개 토론회에 참여하라고 하며 도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루터로 하여금 다시 힘을 얻게 하였고, 그의 구변을 다시 한 번 일깨웠습니다. 얼마 안 되어 라이프치히에서 공개 토론회가 개최되었고, 이 토론회는 몇 주간 지속되었습니다. 에크 박사는 교황 제도를 위하여, 그리고 루터와 칼슈타트는 종교개혁을 위하여 서로 논쟁하였습니다. 이유명한 토론은 다만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계 국가들에 진리가 널리 전파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루터의 성경에 대한 참된 호소는 많은 사람들, 특별히 라이프치히와 비텐베르크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의 마음속에, 견고한 하나님의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탐구하는 영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의 일은 전진하였고, 유럽인들의 마음은 곧 일어나게 될 위대한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1520년에 교황은 독일에서 루터를 이단적이라고 규탄하는 교서를 반포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이어서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1521년 4월에 열릴 보름스회의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갈 것을 결심하고는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나를 공격할지라도 여전히 나는 그곳에 가겠다.”라고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췌

 

 

 

먼저 루터는 1항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여라(마 4:17)'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신자들의 삶은 회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회개의 참된 의미를 밝힌 후 그는 5-7항에서 교황이라도 죄를 용서하거나 벌을 감해 줄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8-13항에서는 교회법이 죽은 자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했고, 14-29항에서는 연옥(purgatory) 교리를 비판했습니다. 30-40항에서 면죄부는 인간이 가공한 교리임을 밝혔고, 41-47항에서 면죄부는 진리를 둡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끝으로 92-95항에서 루터는 죄를 용서하고 벌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그해 11월 초 루터는 이 내용을 친구들과 주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서신을 받은 친구들이 그 내용을 지지하며 그것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 복사본이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바젤 등에 펴져 나갔습니다. 12월에는 여러 다른 도시에도 알려졌고, 2주 후에는 전 독일에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알려졌습니다.

 

3. 보름스 회의

마르틴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그의 첫 번째 청문회를 위하여 보름스 회의에 출두하였습니다. 트레브(Treves) 대법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첫 번째 질문은 루터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본인의 것으로 인정하는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루터는 그 모든 책들이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였고, 두 번째 질문에 관하여 그는 대답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허락되었고 그동안 루터는 기도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음날인 1521년 4월 18일, 마르틴 루터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 책들 중 한 부분에서 저는 교황 제도와 교황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조들과 본들은 기독교 세계를 황폐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도 영적인 재난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짓된 교리들과 불명예스러운 삶들,

그리고 그들의 사악한 방식들에 대하여는 온 인 류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교황이 만든 인위적인 교리들과 법이 신실한 자들의 양심을 얽어매고,

고통스럽게 하고, 비통하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착취와 요구가 기독교 국가들, 

특별히 이 뛰어난 나라의 부와 풍족함을 삼켜버리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단 말입니까!”


다시 루터는 주저함 없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제 믿음을 교황이나 의회 앞에서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빈번하게
잘못을 범하였고, 서로가 상호 모순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의 증언에 의하여 설득되거나, 더할수 없이 분명한 논리에 설득되지 않는 이상
나는 책들을 철회할 수 없으며 그리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의 양심에 어긋나게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슈파이어 회의

1526년, 황제 카를 5세는 종교개혁을 의제로 하여 그 해의 첫 번째 슈파이어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주님의 주권으로 카를 5세는 교황과 심각하게 다투었고, 그 결과 슈파이어 회의는 루터를 정죄하는 대신에 신앙의 자유를 지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독일의 각 주가 그 주를 통치하는 군주의 종교를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1529년에 있었던 그 해의 두 번째 슈파이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이미 개종된 지역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아직 개종되지 않은 지역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로마 천주교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도록 막는 처사였습니다. 1529년 4월 25일, 독일 군주들은 슈파이어 회의가 그들의 신앙의 자유를 철회한 것에 관한 공식적인 이의를 제기하였고, 개혁파들은 이러한 항의(protest)로부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루터의 유명한 종교개혁 찬송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한국복음서원 찬송가 638장)’는 1529년에 작곡된 찬송으로 그 해에 있었던 슈파이어 회의를 위하여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찬송가 사전」, 존 줄리앙). 루터는 이 찬송과 함께 모든 독일인들 앞에서, 복음의 진전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한 항의에 참여하였습니다.

 

 

5. 독일어 성경 출판

루터가 보름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작센 주 제후의 군인들에 의해 은밀하게 바르트부르크를 성으로 옮겨져서 약 1년간 은거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번역본은 1522년 9월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독일어 성경이 1534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손에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눈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를 통한 종교개혁에서 우리는 두 원칙, 곧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첫 번째 원칙과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하다는 두 번째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교회의 증거와 터’라는 메시지에서 “종교개혁에서 루터가 했던 첫 번째 일은 대중에게 성경을 열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가치를 인정 하셨습니다.

 

루터의 말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 이 선물들을 풍족하게 받는 것 외에는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쉴 때, 나는 녹슬게 된다.”

 

“사탄이 모든 아름다운 선율을 독점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일 내가 매일 아침 2시간을 기도에 드리는데 실패한다면, 사탄이 그날 하루 동안 승리를 차지하게 된다. 내게는 매일 3시간을 기도하지 않고서는 처리할 수 없는 매우 많은 일들이 있다.”

 

“항상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기도를 결합시키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의 경우 20년, 잘해야 40년의 기간 동안만 한 장소에서 순수하게 보존된다.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하게 되고,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은 냉담해지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일반적으로 여기게 된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주교들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더 두려워한다. 나의 안에는 가장 큰 교황, 곧 자아가 있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책-성경과,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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