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의 용서만을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면, 왜 바로 죽지 않으시고 삼십 년 이상을 사신 후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는가? 아마도 예수님의 일생 중에 구속하는 죽음이 교계에서 많이 강조되다 보니 이런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은 주 예수님의 육체 되심(성육신)부터 승천까지의 성경 기록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재고해 보게 했습니다.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그분의 육체 되심은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심’이고, 그분의 죽음은 (옛 창조의) ‘종결’(termination), 부활은 (새 창조의) ‘발아’(germination), 승천은 (주와 그리스도로서의) ‘취임’(Inauguration)이고, 그분의 인간 생활은 (참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는) ‘본’을 세우신 기간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시각으로 제게 다가왔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용(forbearance)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빌 4:5).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3장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과 본과 목표로 체험하는 것을 말한 후에, 4장에서는 그것들의 적용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관용(forbearance, 에피에이케스, 1933)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그리 단순하지 않고, ‘Bible Hub’에 있는 영어 성경의 다양한 번역들처럼 여러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된 개념입니다. 참고로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는 관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관용의 정의: “관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합리적이고, 사려 깊고, 배려하며, 자기의 법적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야심이나 헛된 영광(빌 2:3), 불평하거나 따지는 것(빌 2:14)과 대조된다. 관용은 믿는 이들이 살아 낸 탁월한 미덕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각주 2).”
참고로 영한사전은 forbearance을 ‘관용, 용서, 참을성, 자제, 삼가는 것, (권리 행사의) 보류, (채권자의) 지불 유예’라고 했습니다. <확대역>도 관용을 ‘상냥함, 정중함, 인자, 자비로움, 이타적임, 아량, 포용력, 공평함, 참음, 견딤’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들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위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의 ‘염려’(“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가 사탄이 근원이고 그리스도를 살지 않는 인간 생활의 총체라면, 관용은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지 여부가 그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인지를 알 수 있는 핵심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사인 “알려지도록 하십시오”가 명령형 수동태이며, 이것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눈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의 본: 위 관용의 관점에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그분의 삶을 묵상해 보려고 할 때, 몇 가지 장면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래 사례들은 참사람이셨던 그분께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시고 자기의 법적인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시지 않은 장면들이었습니다.
1)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인 주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 한 명인 대제사장의 노예,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귀를 만지시어 고쳐 주셨습니다(눅 22:50-51). 2) 주님은 성전세 내는 문제로 소위 사고를 치고 돌아 온 베드로와 성전세 받는 이들의 입장 모두를 배려하셔서, 바다낚시로 잡은 물고기 입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어 갖다 주도록 안배하셨습니다(마 17:27).
3)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힘든 상태이셨지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한 범죄자의 요청을 받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 23:43). 4)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 등과 동행하실 때,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 관해 일어난 일들에 대해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핀잔을 들으셨지만, 배경이 된 성경의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는 방식으로 담담히 처신하셨습니다(눅 24장 참조). 사실 이런 사례들은 이 외에도 사복음서 도처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적용: 저는 언제부터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요구한 내용들이 저의 삶에서 실천되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쟁이들은 말만 잘한다’는 외부인들의 평가를 수치스럽게 여겼던 그 이후였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삶에서 얼마나 ‘예수 냄새’가 나는지를 평가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기독교 내에서 정치적 신념에 따라 좌우로 나뉘고, 다른 진영에 속한 이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듯한 현상은, 위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과는 많이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정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합니다.
겨울 훈련 집회가 가까워지자 여러 곳으로부터 ‘접대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가볍게 반응하지 않고 어떤 것이 그분들에게 ‘관용’을 보이는 길인지에 대해 주님께 나아가 진지하게 여쭙게 됩니다. 또한 위 본문 말씀을 누린 이후로, 제가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는 모든 이들 앞에서 관용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낸 표현이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오 주님, 저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