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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정부의 박해 하의 순교자들, 예루살렘의 몰락을 포함한 서머나 시기, 그리스도인 집회들과 계급제의 시작
1. 서문
복음이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외부로 퍼지게 되었을 때의 로마제국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마련하신 것으로 모든 것이 복음의 확산을 위해 준비되었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몇 가지 요소들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로마의 정치적 상황, 언어, 국제적인 분위기, 도덕적인 상태를 들 수 있다. 교회 역사를 볼 때, 교회는 이단과 분열, 전쟁과 논쟁들에 직면해 왔고 대적에 의해 어려움을 겪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였으며 4세기 초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견고한 기초가 세워졌다.
유대교는 교회를 가장 먼저 박해했다. 처음 로마인들은 교회와 유대교의 차이를 알지 못했는데 교회 안에서 이방인 믿는 이들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결국 믿는 이들을 무신론자로 분류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우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우상들도 전시하지 않았고 로마 신들에 대한 숭배도 거부했다. 매 주마다 믿는 이들은 모여서 또 다른 왕국이라 부르는 ‘비밀’집회들을 열고,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다’라고 말하는 공동 식사에 참여했는데 이 실행은 식인 행위와 마술 행위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무법자들로 인식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에게 제물을 받치는 것을 거절하자 로마 정부는 교회를 불법적인 종교로 여기게 되었다. 그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자유와 재산, 소유물, 심지어 그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터툴리안(Tetullian)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어떤 공공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공공 재해와 그들에게 발생하는 고통의 원인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티베르강의 수위가 성벽만큼 높아지면, 나일강이 물을 들판 위로 흘려보내지 못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면 즉시 이러한 외침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져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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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후 64년 박해가 시작됨-서머나 시기(주후 64-313년경)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심지어 사도들의 시대에도 하락과 실패가 기어들어왔다는 것이다. 바울만이 디모데후서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고 말했을뿐 아니라(딤후 1:15), 주님께서도 일곱 교회들 중의 첫 번째인 에베소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하락 직후에 혹독한 박해 시대가 이어졌다. 이는 네로의 치세에 그의 선동으로 시작되었고, 거의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기간 동안 역사가 기록해 온 열 개의 일반적이고 뚜렷한 박해들이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과 연결 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계 2:10)” 서머나 교회는 고통 받는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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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 제국 하의 열 번의 박해
첫 번째 박해는 주후 64년 경에 로마에서 네로가 선동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매우 맹렬해서 교회 역사학자인 유세비우사가 기록하기를 “당시 도시들은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늙은이가 젊은이와 같이 눕혀져 있고 성에 대한 존중 없이 대로에 여자들의 사체가 유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발생한 화재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었고 유죄판결 받았다. 네로에 의해 자행된 잔인한 형태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산 채로 불태워 네로의 정원을 밝히게 한 것이다.
두 번째 박해는 티투스의 형제였던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기간에 시작되었고, 주후 90-96년 사이에 로마와 소아시아에서 발생하였다. 황제는 자신을 ‘주와 신’으로 숭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향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사도 요한은 이 시기쯤에 밧모섬으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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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의 박해 아래에서 당시 총독이었단 플리느 2세는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만한 어떤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매일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색출되는 않을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그들의 믿음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처벌당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복음의 확산과 함께 많은 이교도 사원들의 거의 텅 비게 되었다. 주목할 만한 순교자는 안디옥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였는데, 사자들에게 던져지는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밀이다. 그러므로 내가 야수의 이빨에 의해 갈아지면 그리스도의 순전한 빵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좌우명은 ‘검이 가까울수록, 하나님이 더 가깝다’이다. 노인이었던 폴리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고,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내 육체를 사랑하여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불에 던지고 태워 버렸다.
네 번째 박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철학적인 이유로 복음을 반대하는 금욕주의자였다.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이 전가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새로운 법령은 새로운 박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다섯 번째 박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통치 기간 동안, 시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박해는 이집트와 북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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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박해는 막시미누스황제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박해 기간 동안에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죽임을 당했고 무더기로 여기저기 매장 당했다. 어쩔 때는 최소한의 품위도 없이 50-60명이 같이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다.
일곱 번째 박해는 데키우스황제때 그리스도인 모두를 한 번에 진압하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이것이 신앙을 근절하는 가장 성공적이로 체계적인 시도라 그는 여겼다. 로마의 이교도 사원들을 거의 비어있었으나 그리스도인의 집회들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했다. 이러한 박해는 주후 249년과 251년 사이에 로마를 넘어 안디옥과 카르타고까지 확대되었다.
여덟 번째 박해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주후 257년에 한 칙령이 선포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소집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칙령 또한 교회 지도자들을 규탄하여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했고 수많은 이들이 산 채로 화형을 당하거나 참수형을 당했다. 박해는 주후 257년과 260년 사이에 로마,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뒤덮었다. 주목할 만한 순교자들은 첫째,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안이다. 그는 성공적이고 부유한 변호사였고 수사학의 교사였다. 그가 거듭난 해인 주후 246년경에 그는 ‘두번째 출생은 하늘로부터 내쉬어진 그 영을 통하여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그리고 258년에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는 첫 영국인 순교자 알바누스로서 고문을 받고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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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박해는 아우렐리아누스황제 치하에서 시작되었고 순교한 사람들 중 한 명은 참수형을 당한 로마 주교 펠릭스이다.
열 번째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주후 284년과 286년사이에 홀로 통치했다. 그는 주후 286년에 막시미아누스와 왕위를 나누기 위해 그에게 제국의 서부 절반을 통치하도록 했다. 주후 292년에 그 둘은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를 택하여 그들 아래에서 섬기도록 했다. 이러한 통치자들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장 길고 혹독했던 큰 박해가 주후 303년에 제국의 동쪽 절반과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313년까지 계속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주후 305년에 그들의 직무를 포기했고, 따라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을 분할하여 소유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을 포함한 서부 제국을 통치했고, 갈레리우스는 동부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는 동안 로마 군인들은 콘스탄티우스 사후의 아우구수투스로 막센티우스를 세웠다. 막센티우스는 막미미아누스의 아들이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센티우스는 7년 또는 8년간 박해를 계속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배의 자유를 주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주후 306년에 죽어 영국의 요크에 묻히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서부의 가이사가 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12년 로마 근처의 밀비아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배시켰는데, 그때의 공을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에게 돌렸다.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서부 지역에서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주후 313년 리키니우스가 막미시누스를 폐위시킴에 따라 동부 지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이러한 승리들은 박해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모든 형태의 종교를 허용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 주겠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동부의 리키니우스도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교회 역사가들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통과된 몇몇 칙력들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재산, 계급, 특권들을 다 잃게 되고 고문을 면할 수 없으며 교회 건물들은 파괴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집회들은 금지되었고 성서들은 불태워질 위기에 처했다. 성경을 없애버리려는 이러한 시도는 박해의 새로운 형태였다. 행정 장관들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고문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따라서 가족 전체가 다양한 종류의 죽음에 처했는데 어떤 이들은 불에 또 다른 이들은 물에 의해 죽었다. 극심한 고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다. 일반적으로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이 주후 64년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열 가지 박해들을 끝내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