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서머나 시기에 사탄은 처음 3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박해를 통하여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것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 버가모 시기가 시작된 4세기 초반에 사탄은 콘스탄티누스가 주후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것을 통해 교회를 부패시키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로 인해 교회는 로마 제국, 즉 세상과 결혼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지위도 혹독한 박해를 받던 것에서 최고의 호의를 받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앤드류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안의 직위는 이제 사람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믿었으냐에 상관없이 명예, 부, 계급,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고, 이것은 그대로 침례로 이어졌다.” 남자만 12,000명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하급계층에서 새롭게 침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흰옷과 금 20조각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로마 황제가 교회의 공의회를 관장하게 되었다! 교회가 세상과 연합한 결과로 교회는 사탄이 거하는 곳에 거하게 되었다(계 2:13). 버가모 시기는 6세기 후반부인 주후 590년 그레고리우스 아래 우주적인 교황 체계가 확립되었을 때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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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니케아 공의회」
2. 배경
디오클레티우누스는 주후 284년 286년 까지 로마 제국을 홀로 통치했다. 그는 현재의 제국이 너무 커져서 서쪽과 동쪽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군사적 필요도 많아져서 한 지휘관이 한 곳에서 통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후 286년에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불러 그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난 뒤 주후 292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를 포함한 네 명의 통치자에게 그의 부담을 더 나누었다. 그들 중 두 명은 정제라 불렸고, 또 다른 두 명은 부제라고 불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쪽 제국의 아우구스투스와 전 제국의 우두머리로 남아있었고 서열 2위의 막시미아누스는 서쪽 제국을 통치하는 한 단계 낮은 아우구스투스였다. 이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 각각에게 그들을 돕는 부제가 있었는데, 갈렐리우스(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가 동쪽 제국을 도왔고,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티누느 대제의 아버지)가 서쪽 제국을 도왔다. 아우구스투스들은 20년 후에는 의무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부제들이 그들을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주후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동료 막시미아누스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이제 ‘아우구스티(황제들)’가 되었다. 그러나 부제들의 임명에 있어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선발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서쪽에서 세베루스(Severus), 동쪽에서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 Daza)에 대한지지 때문이었다. 둘 다 갈레리우스의 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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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
3.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주후 272 또는 288-337년경)
콘스탄티우스가 주후 306년에 죽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서부의 부제가 되었고, 세베루스는 서부의 정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세베루스를 패배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와 북 아프리카의 통치자가 되었다. 따라서 서부 제국을 향한 투쟁에서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대치는 불가피했다. 주후 312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근처에 있는 밀비안다리에 막센티우스를 만났다. 그 전투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빛의 십자가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 표시 안에서 정복하여라!’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십자가를 그의 상징으로 삼았고, 그 다음날 그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막센티우스는 티베르강을 건저 도망치려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서부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동부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동부 제국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정제고, 그의 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자가 부제였다. 주후 307년에 갈레리우스는 그의 친구 리키니우스를 정제로 임명하여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주후 311년에 갈레리우스가 죽자, 막시미누스 다자는 리키니우스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누이와 결혼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동맹을 맺고, 주후 313년 만에 막시미수느 다자를 물리친 후 동쪽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에 제국을 분배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주후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정책을 협의하였다. 그들을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관용과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그들의 공동 성명 하에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이다. 그러나 주후 323년에 리키니우스가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완전하게 패배하게 되고 그 후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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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주후 324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선택하여 로마를 대신한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천도는 주후 33-년에 완성되었고, 도시의 새로운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이슬람계 투르크족에게 함락 당했는데,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이 그곳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인 신앙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왔고, 현재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양한 이유들로 그의 아들이었던 크리스푸스, 아내 파우스타, 장인 막시미아누스, 처남 막센티우스, 매형 리키니우스 등을 직접 죽이거나 죽게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교회의 수장직을 맡았고, 그와 동시에 이교도의 제사장 직분도 유지했는데, 이것을 그가 죽는 날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죽을 때까지 침례 받는 것을 미뤘다. 이것에 대해 많은 해설가들이 정치적이고도 개인적인 이유를 제시해 왔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침례를 연결키셔 가르쳤다. 이러한 인식 아래 그는 더 이상 죄의 쾌락을 누릴 수 없을 때까지 침례를 연기한 것으로 보인다. 주후 337년 그는 침례를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가 전심으로 믿음을 받아들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앤드류 밀러는 ‘그가 그의 임종의 순간에 진정으로 회개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