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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초기 교회 – 공의회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7.02.06 조회수5026 댓글0

 

1.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a) - 주후 325년

 

 

 

 

주후 318년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더주교와 그의 사제 아리우스 사이에 논쟁이 발생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들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졌다. 그의 이단적인 관점은 ‘아들’이 그의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그를 산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아들이라면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아들이라면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無)에서 아들을 창조하신 것이 분명하고, 비록 우리가 아들을 창조물들 중에서 유일하신 분으로 경배할지라도 여전히 그는 창조물이고, 아버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아들은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아버지의 신격과 아들의 신격 사이에는 실제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가르쳤다.

 

요약하자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함을 부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에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 둘 사이에서 중재자로써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자 그는 교회의 일반 총회를 소집하여 소아시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비티나아의 니케아에서 만나도록 하였다. 첫 일반 총회를 소집할 때의 콘스탄티누스의 의도는 교회의 분열이 그의 제국의 통합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케아 공의회가 열린 날짜는 주후 325년 5월 20일이었지만 이것은 8월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 동부에서 거의 300명 가까이 되는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스스로를 교회와 제국 모두의 머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공식회의는 궁전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열렸다. 그는 기품 있는 광채로 나타났고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로 응하며 장중하게 연설을 한 뒤 공의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났다. 공의회에는 세 정당들이 있었는데 소규모 정당이 아리우스를 지지했고,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은 니코메디아의 주교이자 아리우스의 오랜 동료 유세비우스였다. 또 다른 소규모 정당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알렉산더와 그의 부제인 아타나시우스(그는 공의회 당시 30세도 채 되지 않았다)를 지지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일찍이 그의 책 ‘신성한 말씀의 육체되심에 관하여’로 유명했다. 그 쯤 교회 역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중간 정도 크기의 정당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가 지지한 아리우스 신앙은 공의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자 유세비우스는 그 자신의 신조를 제안하였는데, 이것 또한 공의회가 고려하고 있는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정당들은 중요한 질문들이 위태로운 상태가 빠졌음을 알았고, 공의회가 분명한 쟁점을 표명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정된 신조를 받아들이른ㄴ데 있어서 굳건하게 서 있었다. 토론이 재개되고 무엇보다 헬라어 단어 ‘homoousios’ 즉 같은 본질이라는 단어의 삽입이 쟁점이 되었다. 공의회는 그 개정된 신조를 받아들였고, 확고히 하였다. 결론적으로 헬라어 단어 ‘homoousios’가 채택된 것이다. 또한 개정된 교리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리우스주의가 완전히 거절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리우스의 유명한 특정 인용구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형식으로 일련의 부정적인 문장들을 포함하였다.

 

유세비를 포함한 모든 주교들 중에서 오직 두 명만 제외하고 모두 이 신조에 서명하였다. 거절한 두 주교들은 아리우스와 함께 추방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주의는 니케아 신조에 있어 유죄판결 받고 거절되었다. 그 후에 반 아리우스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와 같은 혹은 비슷한 본질’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통파들은 사용된 그 용어가 정통 신앙을 보호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 절충안을 거절하였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 주후 381년

 

 

 

 

비록 니케아 신조가 명백히 아리우스주의를 비난하고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논란은 주후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실,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그 이후의 다른 로마 황제들에 의해 5번이나 추방당했다. 주후 379년에 태오도시우스 1세가 동방의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니케아 신조에 헌신적이었다. 주후 381년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오직 동방의 주교들만 참석하였다. 그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확증하였으며, 개정판을 만들어냈다. 이 판은 일반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 알려져 있다.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론인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성령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마케도니안주의 또는 ‘성령훼방론’을 거절했다. 이 공의회로 인하여 동부에서 아리우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끝이 났다. 이 공의회의 주목할 만한 참가자들은 세 카파도키아의 교사들 중 두 명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이다.

 

 

 

 

3. 에베소 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 - 주후 431년

 

 

 

 

이 공의회에서 다룬 두 가지 이단론은 네스토리아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였다. 시라아의 성직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교회의 사제가 되었고 주후 428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안디옥 신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칭하는 단어 사용을 지지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신학파의 견해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러한 용어 사용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구분하여 별개의 구별되고 분리되는 인격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그의 믿음에 있어서 그 자신이 실제로 ‘네스토리우스파’였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아주의는 거절되었고, 네트토리우스는 이집트로 추방당하여 주후 451년에 사망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안에서는 박해 당했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의 선교 활동은 동쪽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 7세기에는 중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다루어진 두 번째 이단론은 펠라기우스주의였다. 본래 아일랜드 출신인ㅇ 펠라기우스는 남 웨일스 지방의 영국인 수도사였다. 그는 원죄에 관한 교리를 거절하였고, 죄란 아담의 본성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후손들이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순결하게 태어났다고 여겼다. 그들이 죄인들인 것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 자유 의지에 따라 그의 전례를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신성한 은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단에 대항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몇 편의 논물들을 썼다. 그러므로 주후 431년의 에베소 공회는 펠라기우스주의도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4. 칼레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 - 주후 451년

 

 

 

 

주후 44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였던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셨을 때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새로운 제 삼의 본성으로 합병되었다고 가르쳤다. 에우티케스는 ‘나는 우리의 주님이 연합되기 이전에는 두 본성이었지만, 연합된 후에는 하나의 본성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단성론파의 교리와 같은 것이다. 주후 451년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칼케돈에서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 공의회에 약 600명 가까이 되는 주교들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동부에서 왔으며 로마에서 레오대제의 대리자로 보내어진 4명만이 서부에서 왔다. 공의회는 서로마의 레오 대제가 제시한 입장을 채택하였다. 레오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 모두를 소유하고 계시며 각각은 완전하지만 한 인격 안에서 합병되었다고 가르쳤다. 두 인성의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혼합이나 변화나 구분이나 분리 없이 유지된다. 처음 두 서술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반대되는 것이고, 그 다음의 두 서술어는 안디옥 학파(네스토리우스파)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무엇보다 유티키안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니케아 신조를 재천명했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확증하였다. 또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아주의, 유티키안주의가 제외된 ‘칼케돈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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