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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화. 중세 교회 – 교황 제도의 출현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7.02.21 조회수9260 댓글0

 

1. 서문

 

 

 

콘스탄티누스의 죽음으로, 국가와 교회 사이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로마의 주교들은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교회 안에서 우주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담대하게 제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것은 교황이 세속적인 권력으로부터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점차적으로 황제는 서로마에서 종교적으로나 세상적인 영역에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교황(Pope)’이라는 단어는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papa’의 다른 형태이다. 이것은 이전에 모든 기독교의 주교들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6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총대주교는 로마의 교황으로 바뀌었고 자신이 모든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이며,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440년 레오 1세는 사도 계승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607년 보니파시오 3세는 황제에게 우주적인 주교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줄 것을 강요했다. 9세기부터 교황이라는 칭호는 로마 주교의 독점적인 전유물이었다. 1073년 그레고리 7세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주교 외에는 교황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교황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교황무오론’ 1870년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정해졌다.

 

 

2. 그레고리 1세 – 두아디라 시대의 시작

 

 

 

역사적으로 590년에 그레고리 1세가 교황이 된 것을 두아디라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두아디라는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을 나타낸다. 교황제도는 6세기 후반인 590년에 확립되었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리의 구분에 따르자면 중세의 교회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끝이 났다.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학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로마의 장관이 되었다. 575년에 수도사가 된 그는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의 권력이 붕괴되면서 야만족의 침입이 발생하자 교황이 세속적인 국가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교황에게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에게 부족했던 자금과 권력이 있었다. 그는 연옥이라는 거짓 가르침을 하나의 의견에서 교리로 발전시키면서 이를 확증했다.

 

 

3. 지속되는 교회의 하락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안의 어둠은 더욱 깊어졌고 7세기 초에 사람들의 미신숭배와 성직자들의 무지는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성경은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거의 잊다시피 했으며 자신들의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성직자들이 수두룩했다. 7세기 초는 또한 이슬람교가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시기이다. 이슬람교는 특정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그들은 성상파괴자들이라고 불리며 우상 숭배를 혐오하고 형상들에 대한 경배를 적대시하던 사람들이었다.

 

 

4. 십자군 원정

 

 

 

11세기 말에 들어서자, 사탄은 또 다시 그의 전략을 바꾸었다. 교황의 지위는 그레고리 7세와 황제와의 투쟁으로 인해 단지 부분적인 승리만을 얻을 뿐이었다. 사탄의 새로운 전략은 로마가 악한 동기를 가지고 성전, 즉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칼리프 오마르의 지배 아래 637년 예루살렘을 점유하였다. 9번째 칼리프인 압드 알 말리크는 687년에서 691년 사이에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던 부지 위 혹은 근처에 바위사원을 지었다. 이곳은 오마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기도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모스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오마르 모스크라고 불린다. 732년 칼 마르텔은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았다. 그런데 성묘로 가는 순례자들로부터 그들이 팔레스타인 내에서 받은 모욕과 만행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교황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외관상으로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무덤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어떤 교황도 성취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교황의 세속적인 야망을 실현한 기회였는데 남작과 군주들과 왕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한 싸움에 분주할 것이고, 교황을 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5. 교황제도의 부흥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영예를 부여했다. 황제는 이제 교황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교황에게서 모든 권력을 받았다. 그 결과로 황제는 선출직이 되었고 게르만 국가에서 선거권을 부여 받은 일곱 명의 군주들로부터 선출되었다. 962년 독일의 오토 1세 대제는 교황 요한 12세의 의해 황제로 임명되었다. 황제는 사실상 유럽 기독교의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인식되었다. 그는 프랑스, 영국,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존경받았으나 반드시 복종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권의는 독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후에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선출되었는데, 1806년에 프란시스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를 취했다.

 

 

6. 성직자들의 부도덕성

12세기에 유럽은 성직자들이 통치했고, 성직자들은 교황의 다스림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반대자들의 면전에서 성 베드로의 열쇠를 흔들어대며 그들이 로마 천주교에 복종하지 않으면 천국으로부터 쫓아내서 지옥에 가두어버릴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게다가 고해성사에 의식으로 인해 성직자들은 일종의 영적인 경찰관이 되었다. 이렇게 참된 회개함 없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금전적 제공함으로 죄가 면제되는 악한 면죄부의 실행이 만연해 있었다.

 

 

7. 교황제도의 전성기와 쇠퇴

 

 

 

13세기는 일반적으로 교황의 권력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로 분류된다. 이노켄티우스 3세 시기에 교황은 권력의 정점을 이루었다. 교회와 세상은 교황의 발아래 있었다. 이것은 영국의 존 왕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이노켄티우스 3세의 사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왕과 교황 사이에 캔터베리의 다음 대주교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관해 논쟁이 있었다. 대주교에 대한 교황의 선택은 스티븐 랭턴이었으나 왕은 수도사들이 랭턴을 선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교황은 왕을 파문하는 동시에 영국에 금지제재를 내리고 비어있는 왕위를 프랑스 왕에게 주었다. 1213년 파문당한 존 왕은 결국 교황의 요구에 얌전하게 복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구에는 존 왕이 그의 왕국을 교황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존 왕이 그의 신하로서 일 년에 1000마르크의 임대료를 내고 왕국을 다스리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것은 1320년도까지 간헐적으로 지불되었다.

 

8. 종교재판

스페인 수도사 도미니크는 프랑스 남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29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대자들을 탐지하는데 있어서 재판의 유용성이 공공연히 인정되었다. 결국 툴루즈 회의에서 이것이 항구적인 조직이 되었다. 종교재판관들에게는 모든 집들과 건물들에 들어가서 용의자들에 대한 모든 필요한 조사를 행하는 권한이 전적으로 주어졌다. 성경을 읽는 것이 로마에 의해서 공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여겨졌다.이렇게 가혹한 종교재판제도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도입되었다.

 

 

9. 교황 보니파시오 8세 – 교황 제도 하락의 시작

 

 

 

보니파시오 8세 때에 교황제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여전히 교황은 가장 거룩한 자-‘신성한 군주이자 최고의 황제이며 왕 중의 왕인 존재이다’라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그가 1302년에 발표한 교서에 따르면 ‘더욱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로마교황에세 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고, 진술하고, 명확히 하며, 단언한다’고 되어 있다. 보니파시오는 주로 영국의 에드워드 1세, 프랑스의 필립 4세와 갈등을 일으켰다. 교황과 이들 간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인 상태에 놓이자, 결국에는 필립이 그의 부하 노가레를 보내어 이탈리아 아나니에 있던 보니파시오를 체포하게 되었다. 노가레는 콜론나 가의 수장들과 함께 궁전을 급습하여 강탈하였고, 그리하여 보니파시오의 생명은 위협받았으며 그는 3일 동안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거친 처우로 인해 한 달 뒤에 생을 마감했다.

 

 

10. 아비뇽의 교황들

 

 

 

교황제도의 계속적인 하락의 다음 단계는 교황들이 로마에 살지 않고 남동 프랑스의 론 강 지역인 아비뇽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1309년에 교황 클레멘트 5세는 프랑스 필리프왕의 권력과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비뇽으로 추방되었다. 교황들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프랑스 왕국의 지배하에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러니까 7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교황들이 로마 밖에 거주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두 교황들 간의 전쟁으로 대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11. 대분열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오랜 기간의 망명을 끝내고 로마로 되돌아왔다.1378년에 그가 죽자 이탈리아인인 우르반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아비뇽으로 돌아온 프랑스인 클레멘트 7세를 또한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한 명은 로마에, 다른 한 명은 아비뇽에서 거의 40년 동안 각자가 진정한 교황이라 주장하며 서로를 비난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은 이러한 대분열로 인하여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것이 교황 제도의 계속적인 하락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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