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과 관계된 또 다른 일이 있는데, 호엔촐레른 왕가의 젊은 군주인, 독일 북부의 앨버트라는 행정관의 이야기이다. 그는 두 개의 대주교직과 하나의 주교직에 대한 약속을 보장받기 위해 많은 금액의 돈을 교황에게 지불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오늘날의 기준에서 비교해 볼 때, 푸거가는 빌 게이츠보다 더 부유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교황의 주선에 따라 앨버트는 푸거가 은행에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면죄부의 판매에 관하여 테첼을 그의 최고 대리인으로 삼는 것이 허용되었다.

「앨버트 공」
루터는 면죄부의 판매와 이 사기꾼에 대해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대중적인 연설에 만족하지 않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궁정 교회의 문 앞에 면죄부의 판매를 비난하는,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일 정도까지 나아갔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들은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소식은 유럽 전역을 걸쳐 들불처럼 퍼져 나갔으며, 루터로 하여금 교황의 권력과 격렬하게 충돌하게 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에 보내도록 명령하였고, 거기서 그의 이단적인 말들을 설명할 것을 명령하였다. 교황은 루터가 작센주의 제후인 프레데릭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편지하여 이 이단적인 수도사를 토마스 카예탄 추기경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루터를 로마로 불러들이는 소환장은 아우크스부르크로 불러들이는 소환장으로 바뀌었고, 루터는 이에 대해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루터 95개조 반박문」
1518년, 루터는 카예탄과 회담을 가졌다. “그 추기경은 부드럽고 동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하였고, 루터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루터에게 매우 분명한 말로 교황이 철회를 요청하였고, 그는 철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이해시켰다. 그러자 루터가 말하였다. ‘그러하다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가련한 독일인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던 추기경과 그의 이탈리아 시종들은 루터의 침착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에 놀랐다. 이에 카예탄 추기경이 대답하였다. ‘나는 명령을 하기 위하여 온 것이지 논쟁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자 루터가 대답하였다. ‘그보다는 우리 함께 논쟁의 요점에 대하여 토론하고 그것들을 신성한 성경의 말씀에 따라 판단합시다.’ 그러자 추기경이 외쳤다. ‘무엇이라고! 너는 교황이 너와 같은 독일 시골뜨기의 의견을 신경이나 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황의 새끼손가락이 모든 독일보다 더 강하다. 너는 너의 군주들이 너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집어 들것이라 기대하는가? 너처럼 비참한 벌레와 같은 자를 위해서? 내가 네게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넌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다만 가련한 수도사가 아니라, 괴로운 환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숭고한 답변을 주목하라. ‘과거에도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로마는 정복되었다.’ 그러자 법정은 해산되었다. ‘그 교만한 이탈리아인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자 독일 시골 마을의 한 비참한 수도사가 권력에 반대하고 통치권을 가진 교계의 기도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음에 놀랐다. 비록 그는 이 희생자를 진멸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그의 실패를 보고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주인에게 충고도, 협박도, 간청도, 최고의 명예에 대한 약속도 이 고집스런 독일인을 그의 이단에서부터 돌이키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신실한 증인은 그가 큰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은밀히 그 장소를 빠져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갔다.”
「루터를 심문하는 카예탄(우)」
카예탄의 실패로 인하여 교황은 또 다른 대리인인 찰스 폰 밀티츠를 보내어 루터를 다루게 했다. 다음은 1519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교황의 대사는 루터에 대한 소송사건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거만한 카예탄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는 루터를 ‘나를 친애하는 마르틴’이라고 부르며, 호의를 크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그의 원대한 목적은 아첨과 기만으로 이 종교 개혁가를 꾀어내어 그로 하여금 그의 반박문을 철회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이 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간교한 교황의 대사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교활한 외교관이자 교황의 알라거리는 추종자였고, 루터는 마치 그의 덫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루터가 말하였다, “저는 상대방이 그들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저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 앞으로는 영원히 잠잠하고 이 문제가 이대로 조용히 묻히게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밀티츠는 넘쳐나는 기쁨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단적인 수도사에게 입을 맞추었으며, 그로 하여금 교황에게 참회하는 편지를 쓰도록 유하였고, 그에게 그의 애정과 친절을 아끼지 않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황청과 막 떠오르는 종교 개혁가의 믿음과 거짓에 대한 큰 논쟁은 이 시점에서 종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로마를 향한 루터의 외관상의 화해로 저지될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곧 루터가 침묵하고 로마와 보잘것없는 화목을 한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벨리스크의 저자이자 교황제도의 옹호론자인 에크박사는 루터의 친구인 칼슈타트에게 신학의 논란이 되는 쟁점들 및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선언문에 대한 공개 토론회에 참여하라고 도전하였다. 이것은 루터로 하여금 다시 기운이 나게 하였고, 그의 구변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얼마 안 되어 라이프치히에서 공공 토론회가 개최되었고, 이 토론회는 몇 주간 지속되었다. 에크박사는 교황 제도를 위하여, 그리고 루터와 칼슈타트는 종교개혁을 위하여 서로 논쟁하였다. 이 유명한 토론은 다만 독일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계에 진리가 널리 전파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다. 루터의 성경에 대한 호소는 많은 사람들, 특별히 라이프치히와 비텐베르크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의 마음속에, 견고한 하나님의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탐구하는 영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의 일은 전진하였고, 유럽인의 마음은 곧 발생하게 될 위대한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칼슈타트」
1520년에 교황은 독일에서 루터를 이단적이라고 규탄하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루터는 그 교서들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복사본들을 불태움으로 이에 대한 그의 경멸을 보여 주었고, 또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다.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1521년 4월에 열릴 보름스회의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황제는 루터에게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루터의 친구들은 고작 일세기 전에 얀 후스에게 약속되었던 안전보장도 존중되지 않았다는 것을 루터에게 상기시키면서, 그에게 가지 말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갈 것을 결심하고는 “비록 지붕위에 있는 많은 타일들만큼 많은 마귀들이 나를 공격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곳에 갈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교서들을 태우는 루터」
1521년 4월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출두하기 전, 황제 카를 5세는 같은 해 1월 28일에 보름스에서 샤를 마뉴 축제, 곧 회의를 열었다. “지구상에 과거 그 어떤 시대에서도 이렇게 많은 왕들, 군주들, 고위 성직자들, 귀족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이 한 회의에서 함께 만난 적이 없었다. ‘제후들, 공작들, 대주교들, 백작들, 후작들, 자작들, 주교들, 남작들, 또한 영주들, 한 마을의 장들, 기독교 국가의 왕들의 대사들이 전부 행렬을 이루어 보름스로 가는 길을 가득 채웠다. 유럽과 세계의 평화에 영향을 미친 중대한 질문들과 진리의 승리에 대한 사안이 여기에서 완전하고 진지하게 논의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교황의 대사이자 달변가인 알레안더는 약 3시간 동안 황제와 군주들과 대표자들에게 연설하였다. 그의 앞에는 루터의 책들과 교황의 교서가 있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그 책들과 저자에 대항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하였다. 그는 수십만의 이단자들을 화형 할 만한 오류들이 루터의 글에도 충분히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의 능력과 열정적인 어투는 그 자리에 있는 회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곧이어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 수군거리는 말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알레안더의 오랜 연설에는 하나의 원대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담한 종교 개혁가인 루터가 표면으로 부각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교황측은 루터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회중에 등장함으로서 그의 새로운 의견들이 필연적으로 얻게 될 명성을 두려워하였다. 교황 레오는 루터의 안전보장이 지켜져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고, 주교들은 황제의 안전보장이 이단자들은 보호 할 수 없다는 교황의 말에 동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