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침례파(The Anabap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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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침례파라는 말은 ‘다시 침례를 주는 이들(rebaptiser)’이라는 뜻으로서, 그들을 반대하는 이들이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이다. 재침례파 사람들은 ‘유아침례’를 반대하면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침례를 주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유아 침례는 침례가 아니므로, ‘유아 침례’라는 표현에 반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재침례를 주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들이 주님을 믿은 후에 받은 침례가 그들이 처음으로 받은 침례라고 할 수 있다. 재침례파는 1522년경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스스로를 형제회라고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났는데, 그 주축은 콘래드 그레벨과 펠릭스 맨츠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다가 유아 침례의 오류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야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세속적인 종교의 실패들에 대항하여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하는 것을 회복하였다. 그들은 교회 건물 안에 있는 그림이나 형상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1525년 재침례파의 이러한 관점은 취리히의 주변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시의회에서는 재침례파에 대한 불공평하고 잔인한 법을 통과시켰다. 그레벨은 감옥에서 죽었고, 맨츠는 공개적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1525년부터 1528년까지 재침례파는 독일, 특별히 아우구스버그와 스트라스부르에서 매우 강성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박해도 받았다.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독일의 루터가 모두 그들을 박해하는 데 동조하였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모두의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강제로 건초더미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강요당했으며 반대자들에 의하여, 참수형, 화형,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재침례파는 지속적으로 더 증가되고 확산되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재침례파는 메노 시몬스의 인도 아래 있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메노파라고 불렸다.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그리고 폴란드에 있는 재침례파는 제이콥 후터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후터파로 불렸다. 이 두 집단은 그들의 일을 북미와 러시아로 퍼트렸다. 퀘이커교, 침례파, 그리고 형제회 모두 재침례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이들 중 누구도 그들이 재침례파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하였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많은 찬송들이 투옥된 재침례파에 의해 쓰여졌는데, 이 찬송에서 이들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그들의 체험과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충만한 정도로 표현하였다.
2. 청교도(The Purit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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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이 1558년 영국에서 즉위한 후에, 칼뱅파의 영향을 받은 많은 이들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실행들을 정결하게 하고 교회를 제네바 모형에 따라 교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1560년도 이후 청교도라 불리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엘리자베스 여왕과 가진 첫 번째 논쟁 중 하나는 성직자의 예복, 곧 교회가 정해준 성직자의 의복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의복이 외형적으로 지나치게 로마 가톨릭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또한 성인의 날, 성호를 긋는 것, 성찬식에서 성도가 무릎을 꿇는 것, 성직자의 면죄권 등을 반대하였다. 엘리자베스와 청교도사이의 논쟁은 신언하는 문제에 있어서 더욱더 심회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언은 성경 연구나 복음 전파를 위해 갖는 비공식적인 종교 모임에서 신언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여왕은 대주교 에드문드 그라인달에게 그러한 실행을 없애버리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청교도에 공감한 대주교는 여왕에게 협력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청교도에 대항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국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투옥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문맥을 통해 볼 때, 이는 당시 청교도인 중에 상당수가 영국 국교회를 타도하기 보다는, 영국 국교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3. 경건주의자들(The Pietists)
경건주의는 17세기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는 냉담하고 메마르고 형식적이고 죽어있는 루터교와 일반적인 개혁 교회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 경건주의자(Pietists)라는 말은 라틴어 pietas로부터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영어 pious(경건한)의 유의어이다. 경건주의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될 수 있는데, 내적증거, 주관적인 체험, 마음의 종교, 열정주의자들, 개인적인 성경공부와 기도, 실제적인 거룩함, 의식있는 회심, 복음주의적인 전파, 가난함과 궁핍함에서의 구원, 그리고 신앙의 훈련 등이 있다. 경건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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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출생
의식있는 회심의 체험이 필요하다. 새로운 출생의 내적 증거로는 “내가 눈멀어 있었으나, 이제는 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는 거의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출생(거듭남)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아 완전히, 그리고 온전하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거의 달콤하다는 것은 맛이 이상한 것이다. 거의 뜨겁다는 것은 미지근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2) 개인적인 새롭게 됨
개인적인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가정에서의 소그룹을 통한 개인적인 새롭게 됨, 성경적인 진리는 반드시 매일 실제적인 경건을 살아내는 것을 통하여 모든 믿는 이들안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3) 세상으로부터 분별됨
몇몇의 경건주의자들은 주님께서 만드신 것보다도 더 좁은 길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면 산책의 금지, 인상을 쓰면서 웃기, 특별한 종류의 의복 등을 들 수 있다.
(4)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학교와 고아원을 짓는 일과 같은 자선 행위
(5) 복음전파
경건주의자들은 선교를 중시했으며, 자신이 사는 곳에 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750년도에 경건주의는 정점을 지나게 되고, 그 위세는 모라비아교와 감리교로 이끌어 준다. 경건주의의 유명한 세 사람은 스패너와 프랑케, 그리고 아놀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