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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화. 모라비아 형제회 – 친첸도르프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7.06.02 조회수4190 댓글0

 

 

 

그는 1700년 5월 26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백작으로, 독일 작센지방의 고위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버지의 긍휼이 아이의 마음에 임하시며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그가 참된 미덕의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가 사탄에게 묶인바 되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말씀을 추구케 하소서. 그리하여 그가 시간 안에서, 또 영원토록 평안케 하소서.”

 

그의 아버지는 친첸도르프가 태어난지 6주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재혼하였다. 이런 이유로 경건주의자였던 외할머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그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 구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710년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할레(Halle)대학의 A.H 프랑케 목사 아래로 가게 된다. 할레 대학은 프랑케 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의 중심이었다. 할레대학에서 그는 그의 급우들과 함께 겨자씨 선교단(The Order of the mustard Seed)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무지한 이들에게 복음 전파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들의 좌우명은 “누구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리.”였다.

 

1716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여행을 떠난다. 1721년 그는 작센에 돌아와 그의 임무인 판사와 의원직을 수행했다. 1722년 그는 그의 유산으로 ‘베스텔스도르프’의 오래된 마을을 포함한 넓은 사유지를 구입하였다. 같은 해 그는 그의 진정한 조력자인 ‘에르트무트 도르테아’ 백작부인과 결혼하였다. A.J루이스는 “그녀는 가정의 안락함이나 사생활을 거의 누릴 수 없었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그녀는 집에 찾아온 형제들과 자매들을 위해 봉사하느라 분주했다.”라고 말했다. 친첸도르프와 그의 아내는 한마음으로 그들 자신과 아이들, 그들의 시간과 재산을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위하여 흔들림 없이 헌신했다. 그들은 열두 명의 자녀들을 두었지만 그중 여덟 명이 어릴 때 사망했다.

 

목수인 크리스티안 데이비드는 독일의 ‘세이퍼’라는 이름의 경건주의자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는 모라비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통해 과거에 잊혀진 진리들이 많이 회복되었다. 주님을 믿는 그들은 세이퍼에게 돌아가 작센 지방에 남아 있는 피난민들이 있는 곳이 있는지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크리스티안 데이비드는 세이퍼를 통해 친첸도르프를 만나게 되었다. 모라비아 교회는 원래 모라비아 지역에서 존 후스를 따르던 사람들로서 로마 가톨릭과 절대 타협하지 않은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의 후예였다. 그중 많은 이들은 반종교개혁이 탄압당하면서 그들의 고향인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이었다.

 

친첸도르프는 피난민들(모라비안의 후예들)의 서약을 전해 듣고 크리스티안 데이비드에게 그의 영지에 정착 할 수 있는 허가를 주었다. 1722년 몇몇의 동역자와 함께 온 데이비드 크리스티안은 친첸도르프의 영지 안에 있는 베스텔스근처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었다. 그들은 친첸도르프가 안배해 준 새로운 공동체가 있는 그 지역을 헤른후트(Hernhut, 주님의 보호)라고 이름 지었으며, 총 300명의 피난민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피난민들이 도착한 후부터 빠른 속도로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루터파, 개혁파, 칼뱅파, 비국교도, 보헤미안 형제회, 슈벵크펠트파, 경건주의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유입됨으로 다양한 견해가 생기게 되었고 피할 수 없는 분쟁이 그들 사이에 발생하게 되었다.

 

친첸도르프는 집집마다 다니며 각 가정들과 기도를 하였다. 1727년 5월 12일, 그는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과 ‘분리의 사악함’에 대해 말하였다. A.G 스팽겐버그에 따르면 ‘그 날, 친첸도르프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람들과 공약을 세웠다. 형제회는 각자가 구주에게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진심으로 자기사랑, 아집, 불순종, 자유사상을 포기했다. 그들은 영안에서 가난해지길 원했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을 위한 선호를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 사람들은 모든 것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배우길 원했다. 그들은 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작용하심에 따라 흥분하고 감동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8월 13일, 친첸도르프는 주님의 상 집회에 모든 이들을 함께 불렀다. 집회 가운데 회중들은 성령의 부어지심을 체험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27일 헤른후트의 24명의 형제들과 24명의 자매들에 의해 시작된 매 시간의 중보기도는 100년간 어떠한 방해 없이 수행되었다!

 

 

 

 

이 공동체는 나이, 성별, 결혼 여부에 따라 묶여 다른 연합회로 나뉘어졌다. 그들은 기도와 교통, 찬송, 설교를 위해 함께 모였고, 공동체 일을 수행했다. 하루에 3번은 헤른후트의 모든 이들이 모였다. 아침 4시(겨울은 오전 5시), 오전 8시, 저녁 8시에 모여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상에 모였고 친첸도르프는 애찬실행을 회복했다. 1731년 친첸도르프는 영적인 일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기 위해 공직을 사임했다. 이것은 모라비아 교회가 친첸도르프가 1728년 5월 3일 시작한 ‘데일리 워치워드(Daily Watchwords)’ 혹은 ‘데일리 텍스트(Daily Text)’를 출판한 것과 같은 해이다. 데일리 워치워드는 1980년 후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현재 주님의 회복에서 사용하는 아침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과 유사하다. 아래는 1738년 독일 모라비아 교회에 방문한 존 웨슬리가 모라비아교회에 대한 감상을 표현한 글이다.

 

· 보라 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가, 그렇다. 그들이 강한 믿음으로 주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갈망하는 자들로서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오 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그들 안에 있는 그 영에 동참하게 하소서. 또 그들의 거짓 없는 믿음, 온유함, 지혜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에 참여하게 하소서.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교회는 전 세계복음주의와 교회생활의 확산의 선구자였다. 첫 번째 선교사들은 1732년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헤른후트로 떠나 서인도 세인트토마스를 향해 갔다. 다른 이들은 그린랜드, 수리남, 남아프리카고 떠났고 후에 몇몇은 미국의 조지아, 북 캐롤라이나, 그리고 펜실베니아로 갔다. 그리고 몇몇은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등 많은 다른 곳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 떠났다. 1736년 이후 친첸도르프는 종종 런던에서 집회를 시작하였고 5년 동안 그곳에서 사역했다. 영국에서 벗어나 그는 덴마크, 네덜란드, 러시아, 미국 등지로 선교를 떠났다.

 

친첸도르프는 일생 많은 고통이 있었다. 헤른후트의 혼란과 헤른후트 밖의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의 반대, 정부의 반대, 재정적인 어려움들, 그의 아내의 죽음 등이 있었다. 그의 노년은 헤른후트의 어떤 제한 없이 헌신되었다. 그에게 죽음이 드리워졌을 때, 그는 주님의 기도하는 사람을 볼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친첸도르프의 마지막 말은 “나는 구원자에게 갑니다. 만약 그분께서 내가 이곳에 더 오래 남아있길 원하시지 않는다면 이곳에 나를 붙잡는 어떤 것도 없으니 그분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였다. 1760년 5월 9일 그는 6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남긴 찬송은 2000여 곡이 넘는다.

 

· 찬송가에 남아 있는 친체도르프의 곡 - 한글 찬송가 237장, 이 찬송은 그가 서인도 세인트 토마스 섬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후 쓴 곡으로써 존 웨스릴에 의해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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