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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화. 복음주의파 –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7.06.27 조회수7341 댓글0

 

서문

 

 

 

18세기 모리비안 형제회는 많은 선교사들을 내보냈고, 감리교도들은 복음주의 부흥(Evangelical Revival)을 가져왔다. 이 둘의 강력한 결합은 19세기와 20세기에 복음주의로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영국과 미국에 복음을 확산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확산하고자 영국과 미국에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일으키셨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근대 선교의 아버지이자 창시자인 윌리엄 캐리는 영국의 노샘프턴셔 지방의 폴러스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이었는데, 후에 마을의 학교 교장과 교구의 총무가 되었다. 캐리는 12세에 정규교육을 마치고 정원사가 되었다. 17세에는 구두공의 견습생이 되지만 그의 약한 몸은 바깥에서 하는 육체노동에는 부적합했다. 그는 정규 교육이 부족했지만 열정적으로 지식을 추구했는데 과학과 역사, 여행 서적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는 영국 성공회 교인으로 자라났으나 친구를 따라 비국교도 교회 모임에 갔다가 18세에 구원을 받았다. 캐리는 윌리엄 로(Wiliam Law)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약을 연구하고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독학했다. 그는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성경을 여러 개의 인도어로 번역하는 그의 선교 사업에 아주 유용했다.

 

1785년 그는 ‘케터링’지방 근처의 ‘몰턴’이라는 지역에서 침례교의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성직자로 임명된 후인 1789년에 그는 ‘레스터’ 지방의 ‘하비 레인’에 있는 침례교회로 이사했다. 그 때 당시에는 선교 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이는 많은 사람들이 지상명령(마 28:18-20)이라는 것이 초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리가 노샘프턴셔 지방의 침례교 성직자들 모임에서 이것에 관해 말을 꺼냈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이교도 국가의 이방인들을 개종시킬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어느 날 침례교의 성직자 모임에서 그가 이 문제에 관하여 말을 꺼냈을 때, 한 나이 많은 성직자가 말했다. “앉으시오, 젊은이, 만약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 하신다면, 그대의 도움 없이도 하실 수 있소.” 그리하여 1791년 그는 책을 한 권 출판했다. ‘선교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할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선교에 대한 성경적 뒷받침을 제시했고, 초기 사도 시대부터 모라비안 형제회와 존 웨슬리까지의 교회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선교 활동을 서술했다. 또한 유용한 정보들이 포함된 통계표도 제시했다. 그런 다음 그는 선교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이사야 54장 2절에서 3절을 근거로 유명한 설교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사람들에게 촉구했다.

 

침례교 선교협회(원래 복음전파를 위한 특별 침례교회 선교협회로 불림)가 1792년 설립되었다. 캐리는 이 새로운 협회의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1793년 6월 그는 그의 아내 ‘도로시’와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인도로 향하는 덴마크 선박에 올랐고, 다섯 달 후 캘커타에 도착했다. 초기 인도생활은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그는 영국에서 돈을 거의 받지 않았고, 함께 선교하던 존 토마스는 그들의 돈을 허비해버렸다. 그래서 캐리는 인디고 농장에서 일하며 그와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주거, 식료품, 건강관리에 관한 모든 것이 가족에서 부적합했다. 누구도 극심한 열대성 질병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다. 1794년 그의 다섯 살 난 아들 피터가 이질로 죽자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던 그녀의 아내 도로시는 미치광이가 되어 1807년 사망했다. 게다가 영국 정부와 사기업들은 그의 선교 활동을 반대하며 캐리와 그의 가족들을 영국에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1800년 그는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4마일 떨어진 ‘세람푸르’의 덴마크 거주 지역에 있는 작은 집을 제공받아, 덴마크 정부의 보호 아래 사는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일을 했다. 그때까지 그는 어떤 사람도 주님께 이끄는 기쁨을 누려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해에 두 명의 힌두교 남자들이 주님께 돌이켰고, 1803년까지 25명의 인도인 믿는 이들이 침례를 받았다. 7년의 험난한 선교 후에 캐리는 힌두교를 공격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캐리는 성경을 여러 인도어들로 번역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도의 언어들을 섭렵하여 1801년 신약을, 1809년에 구약을 벵골어로 번역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벵골어, 산스크리트어, 오리아어, 힌디어, 아삼어, 마라티어의 여섯 언어로 번역하고 일부 번역은 24갱의 언어로 번역하여 총 30개의 언어로 번역을 했다. 그는 또한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펀자브어, 텔루구어의 문법책과 사전을 편찬했다.

 

 

 

 

 

캐리는 선교사가 가능한 한 스스로를 부양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도생활 초기에 그는 한 인디고 공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후에 그는 캘커타에 있는 포트윌리엄 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연 1500파운드) 언어 교수로 일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40파운드를 제외한 모든 수입을 선교 사업에 사용했다. 그리고 1819년 그는 인도 학생들을 위한 기독교 학교인 세람푸르 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유아 살해, 아동 매춘, 순장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1829년 인도 개혁가들이 순장을 금지하는 법안을 내놓도록 도와주었다. 캐리의 노력의 결과로 개신교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런던 선교회, 기독교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 선교회, 중국 내지 선교회 같은 선교회들이 결성되었다.

 

알렉산더 더프에 따르면 그가 죽어 가는 캐리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캐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더프씨, 당신은 윌리엄 캐리라는 사람에 관하여 말해왔지만, 제가 죽고 나면 캐리가 아니라 그를 구원하신 분에 관해서 말해 주십시오.” 다른 방문객이 그의 생애 마지막 날 방문하여 물었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와 있는데 어떤 기분이십니까?”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것이라면, 저는 의심의 그림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믿은 분을 압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날에 제가 그분께 약속했던 모든 것들을 지키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타날 것을 생각할 때와 내 모든 죄들과 수많은 결함들이 기억날 때 저는 두렵고 떨립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의 뺨에 눈물이 흘렸다. 그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묘비에는 그의 요청대로 이렇게 적혀 있다.

 

 

 

 

 

윌리엄 캐리 1761. 8. 17 출생

1834. 6. 9 사망

 

비틀리고 가난하고 무력한 벌레가

그분의 자애로운 팔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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