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허드슨 테일러는 런던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시체를 해부하다가 악성 열에 감염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 앞에서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중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주님께서 그를 보낼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그의 믿음을 격려하였고 중국에서의 그의 일생의 사업을 위해 그가 준비되게 했다.
중국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지원을 받아드렸다. 런던에서 의학 수련을 계속하다가 1853년 9월 19일 그의 나이 21세에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리버풀에서 상하이로 향하는 배였다. 그는 수년 후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30년 전에 내가 영국의 해안에서 중국으로 떠날 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나를 배웅하러 리버풀로 오셨다. 이후 6개월 동안 나의 거처가 될 작은 선실로 나를 배웅해 주셨던 그날을 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 손수 내 작은 침대를 쓰다듬으셨다. 우리의 오랜 이별 전에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나와 함께 찬송을 불렀다. 우리는 무릎을 꿇었고, 그녀는 기도했다. 그것이 내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때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 속에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우리는 헤어졌고, 그녀는 해안으로 내려와 나를 축복해 주었다. 나는 갑판에 홀로서 있었고, 어머니는 배가 독문을 향해 움직이는 것의 뒤를 쫒았다. 배가 문을 통과하자,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나는 그때 나의 어머니의 가슴에서 쥐어짜 나오던 고통스런 울음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칼처럼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 지독한 시간 속에서 나의 소중한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녀의 전 일생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거의 확신했다.”
중국에 도착하기 까지 다섯 달의 위험한 항해를 해야 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위험했던 항해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은 뉴기니의 북쪽에 근접해 있을 때 발생했다. 참으로 이 사건은 위험했다. 토요일 밤, 우리는 육지로부터 30마일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일요일 아침 갑판 위에서 진행되는 예배시간동안 나는 선장이 근심에 차서 계속 배의 측면을 들락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4노트 속도의 조류가 우리를 빠른 속도로 암초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너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오후 때까지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녁 식사 이후 구명보트가 꺼내졌고 모든 손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뱃머리를 해안으로부터 돌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우리가 점점 끌려내려 가면서 원주민들이 모래 위를 빠르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장의 지침은 이 사람들이 식인종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도 두려운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갑판 위에서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고 선장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습니다. 이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요, 우리가 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그가 물었다. “이 배에 있는 사람들 중 우리 넷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우리들이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주님께 바로 바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해가 질 때 즉시 우리에게 간단히 구출해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선장은 이 요청을 받아드렸다. 나는 다른 두 사람에게 가서 말했고, 목수와 기도를 한 후에 우리 네 사람 모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기도했는데 우리의 요청이 받아졌다는 느낌에 만족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구할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람을 보내 주셨다. 배는 시간당 6-7노트로 항해했다. 우리가 보고 있던 그 벌거벗은 야만인 무리들은 배를 포획할 수도 없었고 아마 저녁도 먹지 못했을 것 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1854년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때 중국은 시국이 불안정했다. 중국의 각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폭동으로 인해 외국인들의 목숨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독립 선교사였던 그는 집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런던 선교회의 주택에 머물렀고, 그 후에 몇 번 이사를 해야 했다. 그의 집 중 하나는 지붕이 대포에 뜯겨나가서 그 집을 버리기도 했다. 상하이는 매우 추워서 그는 생각을 하거나 펜을 쥐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배고픔과 감시와 위험으로 잠들 수 없는 밤들,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완전한 고립감과 무력감을 그는 인내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안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몇 달 간 집중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나서, 그는 복음지 배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복음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자 설교를 시작했고, 설교여행의 책임자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을 그들의 외모 때문에 ‘흰 악마들’, ‘붉은 머리의 악마들’등으로 불렀다.
그런 장벽들을 허물기 위해,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식으로 살고 중국 복식을 받아들였다. 1857년에 그는 그를 파송한 중국 선교회를 나왔으나 여전히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에게 그의 일을 계속 보고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것도 빚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그가 받는 중국 선교회의 금전적 지원이 빌린 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단순히 그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택했다. 그의 믿음을 독려하기 위하여 그는 두루마리에 한자로 두 개의 성경 단어를 적어 거실에 붙였다. 하나는 ‘에벤에셀’(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고 계신다), 또 다른 하나는 ‘여호와 이레’(주님께서 주실 것이다)였다.
1858년 1월 20일, 허드슨 테일러는 마리아 다이어(Maria J.Dyer)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진정한 조력자였다. 마리아는 중국을 향한 그의 부담과 이상을 나눈 선교교사였다. 허드슨 테일러의 아가서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가 결혼하기 전 마리아와 교제하는 중에 겪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857년 그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나타난다. 후에 그는 연합과 교제(Union and Communion)라는 아가서의 경건한 해설서를 썼다. 그 책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jpg)
허드슨 테일러는 1856년 닝보(NIngpo)에 정착했다. 그리고 1859년에 닝보에 있는 의사 파커의 병원을 맡았다. 그는 상하이-닝보 연안 지역에서 건강상의 문제로 영국으로 강제로 돌아오게 되기까지 6년을 보냈다. 그러므로 1860년 여름, 그와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첫 번째 휴가를 왔다. 영국에 돌아와, 그는 자신이 의학 학위를 딴 런던 병원에서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닝보어로 번역한 신약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루이스(W.G.Lewis)가 목회자로 있던 런던의 침례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복음 대상 지역을 위해 자원자들을 독려할 강한 부담이 있었다. 브라이튼(Brighton)이라는 도시에서 그는 성경을 펴서 글을 적었다. “24명의 자원하고 숙련된 일꾼들을 위하여 기도하다. 브라이튼에서 1865년 6월 25일.” 이틀이 지난 후에 그는 10파운드와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함께 중국 내지 선교회의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열었다. 이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부담은 중국 내륙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