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원 : 1826-1830(빌라델비아 시기의 시작)
형제회 운동은 19세기 더블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형제회(Brethren-그들은 소문자 b를 선호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이며, 어떤 다른 이름 없이 주님께로 함께 모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종파도 반대했다. 형제회는 더블린에서 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초라하고 불분명한 이 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 성령의 위로가 함께한 따뜻한 주님의 임재가 실재했다. 그들은 특별한 두 진리의 노선 위에서 명확하게 세워졌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며, 둘째는 성직자 계급 제도는 신약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일인 목회는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든 진정한 믿는 이들은 몸의 지체들이라 믿었고, 그들에게 오는 모든 자들은 종파의 차이를 개의치 않고 따뜻하게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파주의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히 10:21)’인 대제사장을 가진 사실로 기뻐하였다.그들은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이 제사장으로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자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그 사역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엡 4:12)’하기 위하여 교회들에게 은사를 주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효과적으로 성직자 계급제도의 이중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들의 입장은 A.R. 쇼트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 작은 모임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통의 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 진리의 노선을 따르기로 한 그들의 결의였다.”
1.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파의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한다.
2. 성경의 완전함과 전적인 권위는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과 교회생활을 규제한다.
3. 주님께서 속히 다시 오신다.
더블린에서 형제회 운동의 기원은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다가 곧 하나의 단체로 합쳐진 몇몇 작은 모임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1826년경에 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이 더불린으로 왔다. 그 도시에서 국교회를 따르지 않은 교파 구성원들은 그를 방문객으로서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가 더블린에서 거주하게 되자, 어떤 이들이든지 그들과 떡을 떼기 위해서는 그로 하여금 한 교파의 일원이 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고, 모든 믿는 이들은 한 몸의 지체”이므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더블린의 요크가(York Street) 예배당의 성직자였던 W. 쿠퍼(W. Cooper)는 크로닌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쿠퍼의 집사들 중 한 사람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그 비난에 항의하며 크로닌과 함께 요크가 교회를 떠났다. 윌슨과 크로닌은 윌슨의 집에서 떡을 떼고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후에, 그들에게 크로닌의 사촌인 드러리(Drury)와 팀스(Timms)가 더해졌고, 그들도 함께 요크가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윌슨이 영국을 떠날 때까지 떡을 떼기 위해 계속해서 그의 집에서 모였다. 후에 이 모임은 로워 팸브로크가 13번지(13 Lower Pembroke Street)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inson)이 그들과 합류하였는데, 그는 핏츠윌리엄 광장 9번지(9 Fitzwiliam Square)에 자신의 집에 있는 더 큰 장소를 제공하였고, 이 모임은 그의 집으로 옮겨져 1827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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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
1827년, 존 기퍼드 벨렛(J. G. Bellett)과 존 넬슨 다비(J. N. Darby)가 핏츠윌리엄 광장에서 크로닌(벨렛부인의 사촌)과 허치슨이 함께한 만찬집회에 참석하였다. 저명한 변호사였던 벨렛은 안토니 노리슨 그로브스(A. N. Groves)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영국의 플러머스와 엑스터에서 연수한 치과의사였다. 그로브스는 해외 선교사가 될 부담을 안고 있었다. 1826년 그는 성공회의 성직을 준비하기 위하여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에 입학하였다. 다만 그는 시험을 칠 때에만 출석하도록 요구 받았다. 더블린에 있는 동안 그로브스는 벨렛을 알게 되었다. 초기 형제회에서 잘 알려진 베시 파겟(Bessy Paget)은 1827년 봄에 벨렛이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방금 그로브스가 내게 말하길, 그가 성경에서 본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함께 모이는 믿는 이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자유롭게 떡을 뗄 수 있으며, 사도들의 실행이 지침이 되는 한에서 매 주일날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그분께서 떠나시면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분별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후에 그로브스는 성직자로 임명되는 것이 불필요하다 느끼게 되었고, 1827년 트리니티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는 성공회를 떠나 1829년에 개인 선교사로서 바그다드로 향하였다. 벨렛은 다비(저명한 변호사이자 성직자)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함께 수학하였기 때문이다. 벨렛이 허치슨을 알게 된 것은 다비를 통해서였다. 다비는 벨렛을 통해 그로브스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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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노리슨 그로브스(A. N. Groves)
1828년 다비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성과 합일에 대한 고찰’이라는 한 편의 소책자를 썼는데, 이것은 형제회에서 출판된 수많은 문서 가운데 첫 번째 문서가 되었다.여기서 다비는 자신은 어떤 학파나 집회의 연합체를 형성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이 소책자에서 그는 ‘첫째로 분열된 단체들의 형식적인 연합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연합을 모색하는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바로는 이러한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연합한 단체는 결코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될 수 없으며 다만 로마 가톨릭의 연합에 불과하다. 이러한 단체 안에서는 교회 생활과 말씀의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다. 더욱이 영적 생명의 합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한 합일은 오직 성령의 합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야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어떤 계획이든 우리는 오직 은혜와 그 영의 참된 하나의 원칙에 따라 행할 수 있고, 이것은 반드시 그 영의 운행하심으로 역사된 것이어야 한다. 어떤 집회든지 아들의 왕국을 전적으로 근거해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 집회에서는 완전한 축복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집회는 축복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믿음 자체에 축복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함께 모인 곳에 그분의 이름이 축복을 위해 기록된다. 더 나아가서 합일은 교회의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익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합일은 교회의 합일이 아니며 교회의 본질과 소망을 부인하는 일종의 연합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의 합일은 곧 그 영의 합일이다. 이 합일은 그 영 안에서만 되는 것이므로 오직 그 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완전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로 주님을 기다리고, 그분의 영의 가르침을 따라 기다리며, 그분의 영의 생명을 따라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라. 그들의 선한 목자가 정오에 어디에서 양떼를 먹이는지 안다면, 그들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가게 하라.
1830년, 요한 베시 파넬(John Vessy Parnell)의 제안에 따라, 집회 장소가 옹기어가 11번지(11, Aungier Street)에 있는 한 경매인이 소유한 좀 더 넓은 임대 주택으로 이동했다. 이것은 형제회가 처음으로 구입한 공식 집회 장소였다.
2. 형제회의 확장 : 1830-1845(빌라델비아의 교회의 지속)
1830년까지 아일랜드에는 대략 대여섯의 형제회 모임이 있었다. 영국에서도 다른 장소에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네 곳의 유명한 장소로는 런던(London), 플리머스(Plymouth), 브리스톨(Bristol), 반스터플(Barnstaple)이 있었다.
다빈의 편지는 플리머스와 런던에서 형제회의 시작을 묘사한다. “나는 뉴턴을(1830년에 처음으로)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플리머스(1831년 쯤)로 내려가자고 요청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도착하자마자 이미 이 마을에서 설교를 하고 있던 홀 대령(Captain Hall)의 집을 찾았다. 우리는 성경 읽는 집회를 가졌고 머지않아 떡을 떼기 시작했다. 비록 위그람(Wigram)씨가 런던에서 사역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플리머스에 더 많은 일을 갖고 있었다.
W.H 콜은 ‘형제회의 플리머스 집회를 회상하며’라는 글에서 형제회의 발전을 서술했다. 그 회중의 집회는 고요하고 평온하며 거룩했다. 그들의 찬송은 부드럽고 느렸으며 깊었다. 그들의 경배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감을 보여 주었다. 1843년 이 장면으로 인해 형제회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었다. 그때 교회의 인수가 많은 수로 증가했다. 필리머스의 킹가(King St.)의 작은 집에서 시작하여 곧 1,000여명을 교통 안으로 이끌었고 이 외에도 대략 400여명이 더 있었다.
형제회 운동은 ‘플리머스 형제회’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그들의 초기 모임이 더블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호칭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히 플리머스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천여 명이 합류함으로 그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그들은 옥외 복음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 지방에서 플리머스에서 온 형제회라고 알려졌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플리머스 형제회로 알려졌다.
런던에서의 인도자는 다비와 G. V. 위그램(Wigram)이었다. 그리고 플리머스에서의 인도자는 다비, B.W. 뉴턴(Newton), 위그램, P. F. 홀 대령, J. L. 해리스(Harris), S. P. 트레겔레스(Tregelles), 그리고 H. W. 솔타우(Soltau)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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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넬슨 다비(J. N. Darby) , 조지 뮐러(George Muller)
뉴턴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프란시스 W. 뉴먼이라는 개인 지도 교사가 있었다(프란시스 뉴먼의 형제인 요한 H. 뉴먼은 옥스퍼드 운동의 인도자 중한 사람이다). 요한은 결국에 로마 천주교의 추기경이 되었다. 간략히 말해서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 국교회에서 로마 천주교로 다시 돌아오라는 운동이었다. 요한은 찬송가 64장을 지었다. 1827년 뉴먼은 다비의 사돈인 에드워드 페네파더(Edward Pennefather) 가정의 가정교사가 도기 위해 옥스퍼드를 떠나 덤블린으로 향했다. 더블린에서 뉴먼은 다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후에 다비를 뉴턴에세 소개시켜 준 것은 뉴먼이었으며 뉴턴 역시 다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해리스, 위그램, 그리고 뉴턴은 모두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브리스톨에서 베데스다 예배당(Bethesda Chapel) 안에 있는 형제회 모임의 시작은 1832년 조지 뮐러(George Muller)와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를 통해서였다. 뮐러는 그가 쓴 주님의 다루심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에서 1832년에 8월 13일에 대해 기록하기를 ‘오늘밤 한 형제와 네 자매가 크레이크와 나와 함께 베데스다에서 모여 이루어진 교회 교통에서 어떤 규정도 없이 다만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빛을 주시길 기뻐하실 것임으로 오직 이 빛에 따라 행하기를 갈망했다. 반스터플에서 형제회 모임의 시작은 로버트 C. 채프먼(Chapman)이 그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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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예배당(Bethesda Chapel)
초기의 형제회 운동은 선교회적 정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다른 나라에까지 확장되었다. 우리가 본 것과 같이, 그로브스는 1829년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바그다드로 갔고, 1832년 크로닌, F.W.뉴먼, 콩글턴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합류했다. 후에 그로브스는 인도로 갔다. 1838년 다비는 보(Vaud)에게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사역하도록 초대받았다. 그의 일은 스위에서부터 프랑스 남부로 확산되었다. 다비는 1845년 스위스를 떠났다. 유럽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1843년 뮐러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초대를 받아 6개월간 독일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형제회 운동은 확실히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까지를 포함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과거 뉴질랜드는 인구수 대비 가장 높은 형제회 비율을 가진 곳 중 하나였다.
3. 초기 분열:1845-1849
1845년 다비가 스위스에서 돌아왔을 때, 플리머스 모임에 만족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항의 하였다. 뉴턴은 플리머스의 인도자중 한 사람이었다. 다비는 뉴턴에게 종파주의, 교권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대해 비난했다. 다비(윌리엄 켈리를 포함하여)는 모든 교회는 대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뉴턴은(죠지 뮐러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하고 나서 휴거될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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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윌스 뉴턴(Benjamin Wills Newton )
1845년 12월 28일 주일날 다비, 위그램, 그리고 다른 50명에서 60명 가량의 사람들이 플리머스의 다른 장소(에브링턴 가(Ebrington Street)에 있는 공식적인 모임과 떨어짐)에서 떡을 떼기 시작했다. 1847년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한 교리적인 오류가 포함된 뉴턴의 시편 6장 강의의 각주가 유포 되었다. 뉴턴은 이단으로 비난 받았다. 다비는 뉴턴의 오류를 소책자로 폭로했다. 같은 해 11월, 뉴턴은 그의 오류에 대한 반론으로 ‘몇 가지 교리적인 오류에 대한 시인의 글’을 펴냈다. 1847년 12월 8일 뉴턴은 플리머스를 영구히 떠나 런던으로 갔고, 이때를 뉴턴이 형제회 운동에서 떠난 시점으로 기록한다. 결과적으로 플리머스에서의 모임은 대폭 감소하였고 작은 건물들로 옮기게 되었다.
뉴턴이 떠남으로 형제회 운동의 문제들이 이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1848년 4월 플리머스 모임(뉴턴에 있던)에서 온 우드폴 대위(Captain Woodfall)와 그의 형제들이 브리스톨에 거주하러 왔다. 그리고 브리스톨에 있는 베데스다 교회에서 교통을 가지도록 청했다. 이것이 형제회 안에서 그 유명한 ‘베데스다 논쟁’을 일으켰다. 그들이 베데스다 교통에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베데스다에 있는 브리스톨의 형제회가 우드폴을 조사하여 뉴턴의 이단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찾은 후, 그들은 받아들여졌다. 다비와 다른 이들은 우드폴이 브리스톨의 교통에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있어서 불만스러웠다. 그리하여 브리스톨의 인도자들은 ‘열 명의 편지(The Letter of the Ten)’를 펴내어 그들이 취한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열 명의 편지’는 다비와 다른 이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비는 브리스톨에 있는 뮐러와 크레이크를 방문하여 브리스톨에 있는 베데스다 모임을 다그쳐서 교회가 뉴턴의 문서를 비난하도록 촉구하였다. 뮐러와 크레이크 모두 다비의 제의에 응할 의지가 없었다. 다비는 마침내 리즈에서 1848년 8월 26일을 기점으로 찍은 전단지를 발부함으로 브리스톨의 베데스다 모임뿐 아니라 그곳에 다녔던 사람을 받아들인 모든 모임과 단절하였다. 브리스톨에 있는 베데스다 모임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뮐러와 크레이크는 집회에서 뉴턴의 소책자의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해 공개적으로 진단하고 심판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이 알아낸 것은 뉴턴의 관점이나 책자를 변호하거나 보존하거나 옹호하는 그 어떤 사람도 모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
1849년 7월 다비는 화해하기 위해서 브리스톨에 있는 뮐러를 방문하였다. 다비는 1848년 브리스톨 협의회가 뉴턴의 책자를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이단으로 판정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분열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뮐러는 다르게 보았다.
그리하여, 1848년 이래로 다비를 따르기를 거절한 모임들은 공개파 형제회가 되었다. 그리고 공개파 형제회의 인도자들은 G.뮐러, H.크레이크, A.N.그로브스, R.C.채프먼 등이다. 계속해서 다비를 따랐던 형제회는 폐쇄파 형제회로 알려졌다. 다비를 제외하고, 그들의 인도자는, G.V.위그램, W.캘리, J.B.스토니, F.W.그랜드, E.그로닌, A.뮐러, C.H.메킨토시, G.커팅, C.E.스튜어트, J.덱 등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폐쇄파 형제회는 말씀의 사역이나 가르침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진리에 강했다. 그리고 공개파 형제회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더 비중을 두었다. 즉 그들을 복음에 있어서 우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