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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화. 형제회(The Brethren) -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7.08.12 조회수6104 댓글0

 

 

 

존 넬슨 다비는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그레이트 조지 9번가(후에 10번가로 바뀜)에서 태어났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공립학교에서, 후에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1819년 그는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고 고전 문학 부문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고 졸업했다. 다비는 21세 때 구원받았고 이 구원으로 인해 그의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1822년 1월 21일 아일랜드 법원의 변호사가 된다. 그는 매형인 에드워드 페네파더(후에 아일랜드의 대법원장이 됨)와 아버지를 실망시키면서까지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다비는 성직자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1825년에 대주교 마지(Magee)에 의해 집사로 안배 받고, 1826년에는 영국 성공회의 목사가 된다. 다비는 같은 대학교에 대학원생으로 있었기 때문에 J.G. 벨렛을 알고 있었다. 벨렛은 주님의 상과 초기 형제회의 원칙 등에 관련하여 A. N. 그로브스의 영향을 받았다. 벨렛이 F. 허치슨을 알게 된 것은 다비를 통해서이다. 벨렛 또한 벨렛의 아내가 크로닌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E. 크로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827년 다비와 벨렛은 피츠윌리엄 광장 9번지에 있는 허치슨의 집에서 열린 초기 형제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또한 1872년은 다비가 영국성공회를 떠난 때이기도 하다.

 

다비는 그로브스와 벨렛의 영향을 받지 않고 초기 형제회의 기본 원칙을 깨달았다. 1828년 다비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성과 합일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으로 형제회의 첫 번째 소책자를 썼다. 다비는 후에 황폐화된 교회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생인 F.W. 뉴먼은 다비의 매형인 ‘에드워드 페네파더’가의 가정교사였다. 뉴먼은 1830년 다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다비를 옥스퍼드 대학의 B.W. 뉴턴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뉴턴은 1825년 초에 야기된 형제회의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플리머스에서 인도자가 된 사람이다. 다비는 본국과 해외에서 신실하게 수고하였다. 또 아일랜드, 런던,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캐나다 등을 방문하여 사역하였다. 미국에서 그가 방문하고 수고한 곳은 뉴욕, 티트로이트, 성루이스, 보스톤, 필라델피아, 메사추세스, 샌프란시스코 등이다. 그는 또한 서인도 제도를 방문하였다.

 

 

1875년 다비는 뉴질랜드를 방문하였다. 그의 배는 9월 15일 주일 아침 일찍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형제회 모임이 있는 코브던가 홀 집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제일 앞줄에 앉았다. 그러나 그가 집회에 참석하자 그 모임은 그가 그 유명한 다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서 다비는 모투에카(Motueka)로 가서 모투에카 샌드리지에 있는 제임스 G. 덱(영국에서 온 뉴질랜드 형제회의 인도자)의 집에서 그와 함께 머물렀다. 다비는 마오리족 지구에 있는 마오리 사람들에게 통역 없이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월 중순, 다비는 넬슨(Nelson)을 방문했다. 1876년 2월 다비는 웰링턴(Welington)에 방문했고, 아마 마나와투(Manawatu)와 와이라라파(Wairarapa)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3월에 다비는 크라이스트처치를 방문했다. 또한 남쪽으로 더 내려가 그곳에 있는 티마루(Timaru)와 제럴딘(Geraldine)으로 여행했다. 다비는 1876년 3월 2일 크리이스트처치(Chistchurch)에서 쓴 편지에서 ‘만일 그분이 모든 것이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이것은 놀라운 긍휼이다’라고 말했다. 다비는 뉴질랜드를 정말 매혹적인 나라로 여겼고, 넬슨을 아름다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정돈된 곳이라고 하였다. 1876년 4월 다비는 뉴질랜드를 떠나 호주의 멜버른을 향하여 항해하였고 그 후에 미국을 경유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다비는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그들의 공급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상속받았다. 그는 ‘나는 그렇게 부유하지 않으나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의 일에 바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켈리와 식사할 때 다비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당신을 위하여 평소보다 좀 많이 먹겠습니다.그러나 제 습관은 토요일에 뜨거운 고기구이를 조금 먹고, 주일에 차가운 것, 월요일에 차가운 것, 화욜일도, 수요일에도, 목요일에도 그렇습니다.금요일에는 조금의 고기나 스테이크를 먹어도 아쉽지 않습니다.그렇게 다시 새로운 한주가 돌아갑니다.

 

다비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집이나 숙박 장소에서 모든 것이 단순했고 절제되었다. 하지만, 저녁식사나 차를 마시는 자리에 초대되었을 때, 그는 차려져 있는 것을 자유롭고 감사하게 먹었다. 다비의 옷은 수수했고 옷이 해질 때까지 입었지만,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청결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리머릭(Limerick)에서 다비의 인정 많은 친구가 그가 자는 시간을 틈타 그의 낡은 옷을 새것으로 바꾸었는데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입었다고 한다. 다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사려 깊었으나 자기 위안에는 무관심했다.

 

윌리엄 켈리에 따르면 다비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고전성경과 계시가 담긴 어떤 것에든 부지런하고 비평적인 학생이었으며 또한 교회사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비싼 책을 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비는 3,000여권의 책이 있는 작은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책들 속에 파묻히는 것을 즐겼다고 말했다. 다비는 습관적으로 열심히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자신을 드렸으며, 아무리 바쁘더라도 오후에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단체기도와 교통, 사역을 위한 시간을 따로 빼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참으로 그가 국내에 있든지 국외에 있든지 그의 하루는 종종 성경을 읽는데 드려졌다. 그는 보통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11시에 취침하였다.

 

다비는 그에게 한번 인식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놀라운 재능을 소유하여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비는 매우 친절하고 동정적인 본성을 가졌다. 집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 그의 방한 외투를 말아서 베개로 주었다. 그의 수많은 항해 여정 중 한번은 배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안고 갑판을 밤새도록 걸어서 아이를 보느라 지쳐버린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비가 결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욱 흥미롭다.

 

의심할 바 없이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수차례의 미국 방문 중에 한번은 아이들을 향한 그의 부드러운 배려와 관심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다. 토끼를 키우는 자녀를 둔 한 가난한 형제가 위대한 한 사람(다비)을 접대하게 되어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기회가 왔다. 다비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하고 재치 있게 한 영향력 있는 형제의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가난한 그 형제의 집으로 갔다. 모든 가족이 기대와 설렘으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침울해 하는 작은 소년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가 기르던 토끼가 영광스런 손님의 식사의 주 메뉴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 접대가 진행되는 동안 다비는 작은 소년의 풀이 죽은 태도를 눈치 챘고 그 이유를 물었고, 그 아이는 (이전에 지시했던 것과 반대로) 모든 진실을 말해버렸다. 그 결과 존 넬슨 다비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동정을 표했다.

 

어린 친구의 애완동물을 먹는 것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큰 물 탱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그의 주머니에서 오리 장난감을 꺼내어, 이 작은 소년과 한 시간여 가량 놀아주었다. 이렇게 하여 애완동물을 잃은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님에게 표해야 할 모든 존중이 그 아이에게 주어졌다. 우리 모두의 주와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이 참된 위대함이라고 하셨다.

 

다비는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불신하지 않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며 기뻐했다. 만일 내가 습관적일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도 영적인 마음과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을 찾는다면, 나는 가장 고상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내게 있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비슷비슷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한번은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노인으로서 매우 불편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지치고 피곤한 그는 손위에 머리를 베고 부드러운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을 따르기 원합니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비에 대한 짧은 일화 하나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다비가 매우 연로했을 때 여행 중 숙박을 위해 호텔에서 묵었다고 한다.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그는 간단하게 기도했다. ‘주 예수여,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연로한 성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날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 예수여,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다비에 관한 이 일화를 20년 전에 읽었고, 이것이 수십 년에 걸쳐서 내게 가져다 준 도움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다비는 한 과부인 파워스쿼트부인(Lady Powerscourt)을 사랑하게 되어 약혼하게 되었다. 이 소식에 관해 더블린의 형제회에서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때, 그는 약혼의 상태를 지속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평안이 없었다. 그 약혼은 상호간에 깨지게 되었다. 1836년 파워스쿼트 부인은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상심으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다비는 후에 ‘나는 결혼을 취소했고, 그렇게 함으로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졌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다비는 성경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하였다. 하나의 번역도 방대한 양인데 다비는 세 개나 번역하였다. 다비의 영어 신약 성경은 세계 최고 중의 하나이다.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와 접촉하고 반년이 안 되어, 워치만 니가 멀리서부터 그에게 성경 한권을 보내주었다. 위트니스 리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판의 성경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인정했다. 1996년 말 위트니스 리는 회복역 요한복음 4장 14절의 하반절을 다비의 번역을 기초로 개정하였다. 윌리엄 켈리는 존 넬슨 다비 전집을 34권으로 편집한 사람이다. 다비의 저술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5권의 성경개관일 것이다. 원래 프랑스어로 쓰였는데 켈리에 의해 영어로 변역되고 편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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