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 이스라엘 그 땅은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가 있는 땅이며, 올리브나무와 그 기름과 꿀이 있는 땅입니다. (신 8:8) HOME  >  그리스도의 편지  >  약속의 땅, 이스라엘
5일차 - 엔게디(En Gedi)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6.07.11 조회수3538 댓글0

 

Q. 오늘 우리가 방문하게 되는 엔게디에 대해서 교통해 주십시오.

 

A.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분들은 엔게디라는 지명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엔게디는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면 참으로 재충전되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엔게디는 다윗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고, 열왕기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그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엔게디에 다윗이 피난 와서 숨어 있을 때 사울이 쫓아 왔는데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는데 “내 주여 왜 저를 이렇게 대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대화 이후에 사울이 다윗을 떠나서 다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 권위와 순복에 관련된 기록이 또 있습니다.

 

 

「엔게디로 들어가는 입구」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서 여전히 다윗은 사울에게 순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때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해 사울의 양심을 만졌습니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합당한 다윗의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결코 죽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생명 안에서 행한 방식이었습니다.

 

 

엔게디에 있었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권위에 대한 이러한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시편을 썼는데 그중 시편 35편의 전반부에 다윗의 시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통과한 많은 죽음과 부활의 상황가운데서 체험한 것을 시편에 기록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는 내용도 있고, 또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은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체험한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는 삶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놀랍지 않습니까?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의 말씀을 보면 죽음과 부활의 문제는

다만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리 형제님은 사역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님-사람생활을 언급하면서 항상 빌립보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간생활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엔게디라는 이름의 뜻은 ‘아이벡스의 샘’, 즉 ‘어린양의 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와 현재의 엔게디에 관해서 교통하겠습니다. 엔게디에는 아주 중요한 장소가 있습니다. 물이 있고, 사막이 있습니다. 기온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많은 물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이 있는데 아이벡스입니다. 그곳에 가면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데 높은 기온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다윗이 숨어 있던 동굴」

 

 

고대에 엔게디가 중요했던 이유는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루살렘과 가까웠습니다. 차로 이동 하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걸어서는 삼일정도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고대에 엔게디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특별하고 귀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육계’입니다. 특별한 향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이곳에서 산출되고 있습니다.”

 

 

이 향료의 재료는 귀하기 때문에 아주 비쌉니다. 또한 이곳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해 놓은 곳 중 한 곳입니다. 이곳의 기온은 아주 높은데 우리가 가게 되면 폭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물은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폭포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구멍이 뚫린 동굴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엔게디에 도착해서

 

 

「엔게디에 있는 폭포-이디오피아 유대인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옆에 보이는 학생들은 텔아비브와 가까운 곳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인데 흑인처럼 보이는 학생은 ‘이디오피아’ 출신입니다. 2005년도에 이디오피아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돌아왔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유대인의 후손으로 인정받고 있고 2005년경에 대다수가 돌아왔습니다. 이디오피아 유대인들 또한 좋은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귀환했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학생들 중에 검은색 피부를 가진 학생들이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유대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그들을 유대인으로 볼 것인가에 있어서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그들이 유대교인들이 될 때에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이 좋은 땅으로 돌아오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1060장 ‘나의 영 안에 흐르는 샘 있네’라는 찬송의 마지막 가사에 보면 ‘생명 면류관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훈련시켜서 능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생명이 우리의 영광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에 생명 면류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몇 구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3장10절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사무엘상 라이프 스타디에서 다윗에 관하여 요약한 부분이 있는데 다윗은 고난을 통하여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순종하는 공과를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굴복하는 것을 그는 배웠습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승자였고, 사울은 패배자였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 결국 승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옳고 그름의 영역에 있지 않고 생명 안에서 이기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저곳을 보시면 많은 동굴들이 있는데 우리가 추측하기로 어떤 동굴인지는 모르지만 다윗이 숨었을 동굴이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다윗이 지은 시가 있는데 시편 57편 끝에 보면, 많은 불평과 원망이 있지만 끝에는 주님에 대한 찬양이 나옵니다. 주님에 대한 찬양이야 말로 바로 부활입니다. 항상 우리가 찬양한다면 이것이 부활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을 함께 잃어 보겠습니다.

 

 

「엔게디라는 이름은 '어린양의 샘'이란 뜻이다」

 

 

가이드 설명

 

이곳 엔게디에는 총 네 개의 폭포가 있는데 지금 우리가 본 것은 단 하나만 보고 왔습니다. 산 정상 쪽으로 또 하나의 폭포가 있고 산 정상을 넘어가면 계곡 쪽에 또 폭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만 보았지만 총 네 개의 폭포가 있습니다. 사해면적이 남쪽과 북쪽 부분을 모두 합하면 서울시 면적보다 약 2.7배가량 넓습니다. 사해의 최대 수심은 399m입니다.

 

 

사무엘상 라이프 스타디 교통과 워치만 니 형제님에 대한 교통

 

우리가 함께 읽을 엔게디에 관한 메시지는 사무엘상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15번입니다. 놀라운 사역의 말씀입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께서 워치만 니 형제님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실 때 그분을 ‘생명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공과를 통과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역은 계시와 고난이 더해질 때 산출된다고 말합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 뿐만 아니라 위트니스 리 형제님 모두 계시와 고난이 더해지신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회복의 특징입니다.

 

 

80년대 J형제님과 함께 주님의 회복을 떠난 한 형제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사실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이 취한 길은 옳고 그름의 길을 취했습니다. 사실 누가 잃은 자 입니까? 누가 승리자입니까? 그들의 논쟁은 합당한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의 사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얼바인 교회의 인도자였지만 결국 배역을 따라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그렇게 될 때 그의 유용성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아주 옳았다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었습니다.

 

또 Y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81년도에 제가 홍콩에 갔을 때 리 형제님께서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길을 취하는데 있어서 실족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가 이기는 승자의 길을 가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상 그가 패배자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가족도 그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리 형제님이 그것을 언급하시면서 ‘너무나 슬픈 죽음을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패배자의 죽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리 형제님께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 리 형제님에게 회개하라고 그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자신이 끝까지 옳고, 리 형제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십니다. Y형제님을 따랐던 사람들 조차 그를 떠났고, 결국 외로운 죽음을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 형제님은 결코 사람들과 있을 때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논쟁의 길을 취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취했습니다.”

 

 

1956년대에 워치 만니 형제님에 대하여 비방하는 책들이 나왔을 때 형제님은 그것에 대해서 대항하지 않으시고, 다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제가 이 교통을 했었습니다. 당시 니 형제님과 함께 감옥에 있었던 형제님께서 말하기를 옥중에 니 형제님께서 계실 때 한 찬송을 부르셨는데 그것이 찬송가 141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에 내 마음 달콤해 사랑스런 주 곁으로 나 들림받겠네

참 아름다운 고벨화는 저 포도원에 있으니 참 아름다운 당신을 우리는 그리네’

 

 

이 가사는 다만 고통이 아니라 니 형제님께서 옥중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옥중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깊은 마음 안에서 달콤하게 주님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교통을 들으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억한 워치 만 니 형제님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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